대만이야기-06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을 허용한 대만
- Nehemiah Tan
- 2019년 6월 4일
- 6분 분량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을 허용한 대만

들어가는 말
지난 5월 17일 중화민국-대만의 입법원(국회)이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이것은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20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The San Francisco Examiner)지와의 인터뷰 중에서 천명했던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좌절시키게 하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동성결혼에 대해서는 개인이 기독교 신앙을 지녔는지 와는 관계없이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교회 밖에서도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개인과 집단,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개인과 집단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정 입장으로 사안을 바라보기보다, 대만이라는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동성결혼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시도는 2003년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 정권의 총통부 인권자문위원회에서 ‘인권기본법’ 초안을 통과시켰는데, 초안의 26조 ‘결혼권 및 가정 조직권’에는 ‘사람은 자유의지로 결혼과 가정을 조직할 권리가 있다. 동성 남녀가 조직한 가정은 법에 의거하여 자녀를 입양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 초안은 당시 내각에서도 반대가 있어 입법절차를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첫 법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후 2006년 민진당의 한 입법위원(국회의원)이 38명의 의원의 서명을 얻어 ‘동성혼인법’이라는 초안을 제출하였으나,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진영에서 서명에 참여하지 않아 절차위원회에서 재의(再議)하게 되었지만, 위원회에서는 이를 의사일정에 넣지 않아 자연적으로 폐기가 되었다. 이는 정치권에서 진행되었던 합법화 추진이었다.
정치권에서 진행하던 것이 좌초를 겪자 동성애자들과 이들의 결혼을 지지하는 인권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는 ‘대만파트너권익추진연맹(臺灣伴侶權益推動聯盟, Taiwan Alliance to Promote Civil Partnership Rights)’인데, 이들은 2010년부터 동성파트너 권익을 보장하는 각국의 법률과 운동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였고, 2012년 7월에 ‘결혼 평등권(동성결혼 포함) 법안’, ‘파트너제도 초안’, ‘가족제도 초안’ 등 3개의 초안을 작성하여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 초안은 2013년에 한 입법위원이 대리자로 초안을 상정하여 입법원에서 1차 통과하였고, 2014년 입법원 사법 및 법제위원회에서 법안을 토론하였는데, 이는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국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법무부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두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면 사회적인 쟁의가 큰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법무부는 ‘민법’을 수정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고, 동성 파트너의 결혼을 위한 권익을 위해 법에서 ‘양성(또는 남녀)’이라는 용어를 다 삭제한다면 중화민국이 지닌 가족과 인륜에 대한 관념과 크게 어긋나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주장을 펼쳤다. 사법 및 법제위원회에서의 이 논의는 결국 어떠한 결과를 남기지 못하고 폐회하게 되었고, 흐지부지 종결하게 되었다.
비교적 큰 충돌을 일으켰던 경우는 2016년 ‘민법 친속편 혼인장’을 수정하자는 경우였는데, 이는 2016년 민진당이 입법원에서 다수의 석차를 얻은 것과 현재 대만 총통인 차이잉원(蔡英文)이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을 지지한 것과 연관이 있다. 이후 민진당 의원을 포함한 의원은 민법을 수정하는 초안을 제출하였고, 공청회를 진행하기도 하였는데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입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한 ‘다음세대행복연맹(下一代幸福聯盟)’의 지지자가 의장을 난입하여 의사 진행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후 법무부는 ‘동성파트너 법안’을 만드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중이라고 밝혔으나, 이는 동성애자 인권운동단체와 일부 법조계 인사들이 ‘혼인’이 아닌 ‘파트너’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강력하게 반응을 하여 민법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다시 가닥을 잡았다. 이는 이후 2차 통과가 되어서 여야 간의 협상을 진행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으나 이후 표결에서 부결되었다.
사실 대만의 동성결혼을 가능하게 한 사건은 의외의 것이었다. 1986년에 타이베이(臺北) 시내의 한 맥도날드에서 기자회견을 연 치짜웨이(祁家威, Chi Chia-wei)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남성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이후 그는 한 동성과 지방법원에 공증 결혼을 하고자 신청을 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고, 입법원에 청원을 하였으나 “동성애는 소수의 변태이며, 순전히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자이며, 사회의 선량한 풍속을 위해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공문을 받았으며, 계엄 시절의 당시 정부는 인권 의제와 인권운동 인사에 대해서 민감하였기에 그는 정부의 구금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자 했고, 2015년에 그는 법원에 헌법해석 신청을 하였는데 이 신청이 2017년에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서 헌법법정(헌법재판소)가 열리게 되었다. 5월 24일에 내린 판결에서는 민법의 혼인에 대한 법조항이 같은 성별의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경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친밀성과 배타성을 지닌 영구적 결합관계를 성립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은 헌법 제22조 결혼 자유 보장 및 제7조 평등권 보장에 위배 된다고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판결한 날짜부터 2년 이내에 법률을 수정하거나 새로 제정을 하든지, 어떤 형식으로든 혼인 자유의 평등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사실 이 판결이 있기 이전에도 기독교계 안에서 이미 동성애자들의 생활에 대한 보장의 필요는 있다고 느껴 ‘동성파트너법’을 제정하여 이들이 법적으로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보장하도록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계와 다수의 시민은 ‘결혼’의 정의를 ‘1남 1녀’에서 ‘두 사람’으로 변경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신념과 정서상 동의할 수 없기에,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입장을 지녔던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기독교계의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교단과 집단과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성결혼을 찬성하는 인권운동 진영은 ‘결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라고 규정하여 반대하고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2018년 11월 24일에 국민투표를 진행하였다. 이때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진영은 “당신은 민법에서 규정한 결혼은 1남 1녀의 한정된 결합이라는 정의에 동의하는가?”, “당신은 교육부가 국민교육단계(초등학교,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별평등교육법시행세칙’에서 정한 동성애 교육을 시행하는 것을 동의하는가?”, “당신은 민법의 혼인 규정 외의 다른 형식으로 같은 성별의 두 사람이 영구적 공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권익을 보장하는 것에 동의하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제출하였고, 동성애자 인권운동 진영에서는 “당신은 민법 혼인장으로 같은 성별의 두 사람의 결혼관계를 보장하는 것을 동의하는가?(따로 동성결혼에 대한 입법을 하지 않는 형식)”과 “당신은 ‘성별평등교육법’에서 규정한 국민교육의 각 단계에서 성별평등교육을 시행하되, 정감교육, 성교육, 동성애 교육 등 과정을 포함하는 것을 동의하는가?”라는 두 질문을 제출하였다. 즉 쟁점은 동성애자가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표결이 아니라 결혼의 정의를 변경해서 그들의 생활을 보장할 것인가, 아니면 결혼의 정의를 변경하지 않는 선에서 같은 성별의 두 사람이 파트너라는 형식으로 영구적 공동생활을 합법화하느냐에 대한 것이 하나였고,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의 단계에서 동성애에 대한 교육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국민투표에서 앞의 세 문항은 압도적으로 동의표를 얻었고, 뒤의 두 문항은 압도적으로 반대표를 얻었다. 그래서 민법을 수정하지 않은 형식으로 동성 결합에 대한 법을 입법하여 시행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혀서 다수의 국민과 기독교계는 안심을 하기도 하였다.
위에 언급한 헌법소원의 결과로 인해 올해 초 행정원에서 통과된 초안과 ‘결혼’과 ‘배우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다른 초안, 그리고 ‘동성결합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한 절충안을 놓고 토의를 진행하였다. 이 중 가장 진보적인 초안이 통과되었고, 5월 22일 차이잉원 총통이 공포함으로 5월 24일부로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다.
동성결혼법에 대한 쟁의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것에 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현재 통과된 법은 사실상 동성결혼을 허락한 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민법상의 혼인에 대한 정의를 변경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것이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이중적인 정의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동성결혼의 등기와 기타 권리와 사회적인 보장이 민법을 준용(準用)하도록 규정되었는데, 이는 ‘동일하지 않으나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결국 동성결혼은 민법에서의 결혼에 대한 정의를 준용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결혼이 되었다. 이것은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된 다수의 국민이 동의한 ‘민법의 결혼의 정의를 변경하지 않는 것’의 의도를 위배한 것이며, 비록 ‘민법 이외에 영구적 공동생활에 대한 보장’을 한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결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민법을 준용한 법안이라는 의견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외에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동성애 교육’을 시행하지 않도록 하는 국민투표의 결과가 나왔지만 교육부는 이를 준수하는 것같이 보였으나, ‘동성애 교육’을 ‘성별 정체성 및 지향성 교육’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 많은 학부모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이 쟁의 또한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동성결혼법에 대한 쟁의는 진행형이다. 그러나 변경되기 어려운 사실은 법안이 이미 입법되어 발효가 된 상태이며, 5월 24일부터 이미 동성 ‘결혼’한 동성 ‘배우자’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계는 ‘민법에서의 결혼의 정의가 변경된 것은 아니기에 전통적이며 성경적인 결혼의 정의를 아이들에게 더욱 강화해서 교육해야 된다’는 입장을 표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만의 개방성과 수용성
최창근은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에서 대만과 한국은 정서·지리·역사적으로 가까운 나라라고 하면서, “일본의 식민통치, 이념으로 인한 분단, 경제성장, 권위주의 통치기를 거쳐 정치적 민주화도 이루어낸, 정치발전과 경제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드문 성공사례 등 많은 비교정치학자들이 ‘지구상의 가장 비슷한 나라’의 사례로 두 나라를 꼽는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이에 대만과 한국의 비슷한 점 한 가지를 첨가하고 싶다. 그것은 민주와 자유 문화의 형성이다. 다만 그 시기에 차이는 있었다. 대만은 장제스(蔣介石)가 사망한(1975년) 이후의 시절부터 민주와 자유의 분위기가 생겨나고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민주와 자유의 분위기가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자유와 민주의 분위기가 생겨난 시기의 차이가 존재하고, 한국이 대만보다 문화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편이기 때문에 대만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민주의 발전은 약간 앞서 있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개방성과 수용성과도 연관이 되어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대만이 개방성과 수용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인 것은 사실이다,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에서 2018년 발표한 시민자유지수에서 대만은 7개 등급 중 1등급으로, 한국은 2등급으로 발표가 되었다. 대만이 아시아 최초의 동성결혼 합법화 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의아해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동성결혼이 합법화가 되는 과정이 정치와 연관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차이잉원 총통의 지지율이 민진당 차기 대선 후보 경선에 도전할 수 없는 정도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동성결혼 법안이 통과된 이후 40%대로 급격하게 반등하여 재선 출마 가능성이 높아졌기에 차이잉원 정권이 지지율을 얻기 위해 동성결혼 법안을 중시하고 통과시켰다는 대만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그리고 언론에 동성결혼을 찬성하는 쪽으로 ‘보도지침’이 내려졌다고 의심될 정도로 언론은 동성애 반대 진영에 각박하였다. 수만 명이 타이베이 중심에 모여 집회를 하였지만 어떤 언론에서도 보도가 되지 않은 일도 있었다.
나가는 말 여하튼 이 글은 한국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일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대만의 동성결혼법안 통과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입법이 되었다는 것과 현재까지도 논쟁은 지속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의도가 있었다. 한국 또한 동성애로 인한 집단 간의 대립된 상황에 존재하기에, 대만에서의 동성결혼법의 시행과 쟁의,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적인 영향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그 추이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필자는 대만의 자유와 민주의 문화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비교적 수용적인 태도를 지닌 한 단편을 드러내 보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대만에 대한 이해가 보다 높아졌기를 바란다.
- 웹진 <중국을 주께로>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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