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07-중화민국-대만국적의 '한국화교'이야기
- Nehemiah Tan
- 2019년 7월 6일
- 5분 분량
중화민국-대만 국적의 ‘한국화교’ 이야기

들어가는 말
“저는 본적으로는 중국인이고, 출생지로는 한국인이며, 국적으로는 대만인입니다.”이는 필자가 근래 국내외에서 국제회의나 만남의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머리말이다. 가정사를 이야기하면서 첫머리부터 세 나라를 언급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필자의 특수한 상황이라기보다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1만여 한국화교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신분이요 상황이다. 이번 글에서는 중화민국-대만 국적으로 한국에 살아가는 한국화교의 삶과 고민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화교의 이주의 시초 한반도로의 이주 역사를 살핀다면,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사람은 많았고, 이들은 또한 여러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한국인으로 동화가 되었고, 실제로 현재의 한국화교와도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근대 한국화교의 시초는 18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82년 6월 9일 조선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했을 때,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청(淸)은 장군인 오장경(吳長慶)이 군 3,000명을 이끌고 대원군을 체포하여, 명성황후가 다시 권좌에 오르게 돕게 하였다. 이때 오장경이 통솔한 사람들에는 군속(軍屬)과 상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현대 한국화교의 시조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882년 10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이 되어 이들의 조선 이주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제한된 지역에서 거주하며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으로 이주한 중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청의 공관을 설치하고 관원을 파견할 수 있게도 하였다. 즉, 외국인으로서 조선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상업활동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이주해온 중국인들은 화교(華僑,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로서 그들의 삶을 영위하기 시작하였고, 한반도의 근대사와 함께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한 한국화교의 국가 정체성 이야기 필자는 한국화교 3세로서 제5공화국 시절에 태어났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필자의 학력에는 ‘한성화교소학 부속유치원’부터 ‘한성화교중학’까지 ‘한성화교’로 채워져 있다. 당시의 연희동-연남동은 화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필자는 화교학교와 화교 커뮤니티에서 성장하였기에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없었고, 필자는 당연히 ‘중국인’이었다. 이는 이민 1세대의 선조부께서 어려서부터 필자에게 주입한 사상이며, 화교학교에서 받은 교육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대만에서 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국가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대만 친구들이 나를 ‘한국인’이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친구들에게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야, 내 국적은 중화민국이야, 너희들과 똑같아.”라고 수없이 설명하고, 필자의 유일한 여권인 중화민국 여권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다음에 그 들이 새로운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여전히 “이 친구는 한국에서 온 한국인이야.”라고 소개하기 일쑤였다. 자기의 나라라고 생각한 곳에서 배척을 당한 필자는 진지하게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본적이 중국 산동성(山東省)이기 때문에 나는 핏줄로서는 중국인이 틀림이 없다. 태어난 곳은 대한민국이지만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국적법상 속인주의(屬人主義)을 따르기에, 비록 이 땅에서 태어났으나 한국 국적을 지니지 않았고, 중화민국 국적을 지녔다. 필자의 선조부께서 한국으로 이주해오셨을 때 대륙은 여전히 중화민국이었고, 이후 국공내전(國共內戰)을 걸쳐 대륙이 공산당정권의 손에 넘어갔을 때 중화민국은 대만으로 후퇴하였다. 그렇기에 필자의 처음으로 발급받은 여권 표지에는 ‘중화민국’이라고 찍혀 있었고, 이 여권에 ‘대만’이 병기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중국을주께로〉 5월호에 실린 필자의 ‘대만 이야기-대만인의 정체성’에서 국공내전 이후 대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다뤘다. 그러나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들은, 언제든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조국 땅에 죽의 장막이 세워졌다는 거대한 변화의 소식을 들었고, 공산당이 집권한 나라에 돌아가기는 싫었으며, 거주지에 이미 적응을 하였기에 이주하지 않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주(定住)를 하여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필자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이런 역사적인 풍랑 속에서 일어난 파도와 같았다. 멈출 수 없고,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물은 다만 ‘파도’라는 이름을 소유할 뿐이다. 필자의 정체성은 신앙적으로는 잠시 이 땅에 거주하는 ‘천국’의 백성이요, 실제의 삶 속에서는 ‘한국화교’로 귀결이 되었다.
한국화교의 보편적인 국가 정체성 고민 사실 필자가 대학을 진학한 시기에는 선배들의 상황과 다르게 한국화교 청소년이 대만으로 진학하는 비율보다 한국 대학으로 진학하는 비율이 월등하게 많았다. 필자의 동창들은 한국 대학을 진학하면서 화교 커뮤니티가 아닌 한국인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었고, 대학생활을 하면서, 중국과 대만에서 온 유학생들을 만나면서, 취업하면서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중국과 대만에서 온 유학생을 만나면서 그 안에 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뿌리는 중국이니, 중국에서 온 유학생과 더 비슷한 것 같지만, 중국은 공산당이 집권해온 사회주의 국가이고, 한국화교는 오히려 대만 정부에서 보내준 교과서로 공부하였기에, 역사 교과서를 보면 중화민국 때부터 지금까지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양측 정부의 이념에 따라 달랐다. 교육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한국화교는 공부한 내용과 민주주의적 가치는 대만에 가까웠지만, 평생 ‘중국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왔던 사람이 ‘대만인 정체성’을 가져야만 심리적으로 불편함 없이 수용되는 ‘대만 사람’이라는 단어로 자칭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대만과도 동질성을 느끼기엔 거리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체적으로 한국화교들은 그저 ‘한국화교’로 정체성을 확정하며, 필요시에는 정체성과 관계없이 편의상 ‘대만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화교가 국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다른 한 가지의 이유는 중화민국-대만 정부의 본토화(本土化) 정책에 있다. 대만은 대만에 거주하고 있는 ‘대만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만들어가고 있으며, 스스로 유엔을 탈퇴한 나라는 다시금 국제 정세 속에서 ‘Taiwan’으로 인정되고자 하는 상황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대만인 정체성을 소유하지 않은 역사의 산물들을 신경을 쓸 겨를도 없고, 심지어 이들은 신분증도 없어 유권자도 아니기에 안중에도 없다.
사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한국화교가 대만으로 공부를 하러 가고자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대만에 가서 입시를 볼 수도 없고, 국내 학생들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기에 정부는 한국으로 사람들을 보내서 대입을 위한 시험을 치르게 하였고, 점수와 지망에 따라 재외국민 전형으로 국내의 각 대학에 입학시켜 주었다. 전후 시대에 대만으로 공부하러 갔던 선배들은 마땅한 교통편이 없었는데, 사정을 알았던 당시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군함을 보내어 대만으로의 진학이 확정된 사람들을 데리고 가기도 하였다. 그만큼 해외 화교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대만으로 진학한 선배들은 ‘중화민국국민신분증’을 발급받아서 대만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대만에 정주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대만의 국적법이 바뀌면서, 원래 ‘신분증’을 발급했던 것이 ‘거류증’으로 대체가 되었고, 심지어 근래는 여권에 차등을 두어 대만에 호적이 없음으로 여권에 신분증 번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재외국민(재대무호적국민, 在臺無戶籍國民)의 여권은 비자 면제 프로그램에서 빠져, 132개국을 무비자 또는 도착비자(VOA)로 여행할 수 있는 국내 여권에 반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일일이 비자를 발급을 받아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한국에서 취업할 때의 매우 중요한 항목인 ‘해외여행 결격사유’가 생겼기에 결국은 ‘내 나라’라고 생각했던 중화민국-대만에 대해 분노와 아쉬움의 감정을 갖고, 국가 정체성의 고민을 남겨둔 채,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화교는 과거 한국 정부의 제도적인 차별을 참아내었고, 지금은 보다 합리적인 상황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이제는 본국의 정부가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 발목을 잡는 형국이 되어 ‘중국인’이라고 교육을 받았고, ‘대만인’이라고 정체성을 잡아가는 과정 속에서 ‘한국인’이라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국화교를 알기 위한 책들 짧은 글에 한국화교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기에 필자는 독자들에게 한국화교에 대해 진일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책을 두 권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책은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이정희 교수의 《화교가 없는 나라》(동아시아 출판사, 2018)이다. 이 책은 근간(近刊)으로 한국화교에 대한 역사와 현황에 대해 소상히 소개를 하고 있으며, 20여 년 동안 한국화교를 연구한 연구자로서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한국화교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서술한 입문서이다.
한국화교의 역사적 변천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고 싶은 사람들은 국립대만사범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왕언메이 교수의 《동아시아 현대사 속의 한국화교-냉전체제와 조국 의식》(학고방, 2013)을 추천한다. 이 책은 1945년 이전의 화교 사회를 다루는 것으로 시작으로 특히 냉전체제와 국가 분열 속에서의 한국화교의 연관성에 대해서 밝히고 있으며, 이후 한국에서의 화교의 삶과 법, 사회, 제도, 차별, 정체성 등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다.
나가는 말 본 글에서는 한국화교의 시작에 대해 잠시 다루고, 필자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화교가 보편적으로 겪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한국화교의 현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나눴다. 연재의 주재가 ‘대만 이야기’이지만, 한국화교는 중화민국 국적을 지니고 있기에 대만의 재외국민이기도 하니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은 내용일 것이다.
필자는 본 글을 마무리하면서 함께 하나님 나라 안에서 동역자가 된 독자들에게 한국화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도해주길 부탁하고자 한다. 한국화교는 백 년 전 이 땅을 찾아온 이웃이요, 한국전쟁 때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 군대에 속하여 함께 공산군과 싸웠던 전우요, 이제는 4대, 5대째 거주하고 있는 식구이다. 이들을 위한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어, ‘중국을 주께로’ 드리는 1여정에 동반자로서 연합하고 동역하기를 소망한다.
사진 | 구글, 네이버 차이나랩 담느헤미야 | 인창제일교회 전도사
안유형의 글을 읽으면 너무 공감이 되고 또한 한국인으로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어요. 선교사 자녀로 해외에서 지내서 받는 어느 정도 차별을 경험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외국인들이 받는 차별은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형의 글을 읽으면서 더 알게 된 것 같아요. 이런 글 올려줫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