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02-대만교회는 예의가 없나
- Nehemiah Tan
- 2019년 5월 9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19년 5월 9일
대만교회는 예의가 없나
“말은 민족의 정신이고,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영화 《말모이》의 흥행으로 다시금 조명을 받은 이 말은 사실 조선어학회 회장이며 독립운동가인 이극로 선생의 말이다. 그의 말은 그의 일생의 약사(略史)이며, 그 내용은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한 좋은 정의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언어는 쉽게 상호비교를 할 수 있는 대상일까? 우리는 흔히 ‘중국어에는 존댓말이 없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어서 애들이 부모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을 이따금씩 듣는다. 한국어 ‘존댓말’의 개념을 가지고 찾는다면 중국어에는 존댓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언어가 존댓말을 가져야 할까? 중국어에 존댓말이 없으니 중국어는 예의가 없는 언어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어는 한국식의 어미(語尾)에 조사 ‘요’를 붙이는 식의 존댓말은 없으나, 예의 있게 말하는 방법은 어느 언어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 말은 정신과 연관되어 있기에 사용하는 말에 따라 문화가 새로이 형성되기도 하고, 형성된 문화로 인해 언어 또한 영향받기 마련이다.
“목회자에게 ‘너’라니?”
한국인이 대만 그리스도인을 접하고, 대만교회를 경험할 때 자주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대만교회 교인들은 사람을 너무 편하게 대한다’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직적인 구조의 한국교회보다 수평적인 구조의 대만교회가 좋다는 칭찬일 때도 있지만 혀를 차면서 예의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이 가장 놀라는 것은 아마도 목회자에게 “니(你, nǐ, 당신)”이라고 부르는 경우일 것이다. 차라리 영어는 익숙해서 ‘You’라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지만 중국어는 이웃 나라 언어이기에 그런 것일까? ‘니’는 한국어에서도 사용되는 발음이기에 목회자에게 사용할 때 더욱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중국어에서 3인칭 단수에 대한 높임말은 “닌(您, nín)”이 있지만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일상에서는 사용하면 오히려 더 어색한 높임으로 들리기도 한다.
필자가 대만의 대학에 진학을 하고 첫 학기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 자란 필자는 비록 화교 학교를 다녔지만 동방예의지국의 인사성과 예의범절에 익숙했다. 대만교회에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필자에게 한 고등학생이 다가와 필자의 이름을 불렀다. 하마터면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 고등학생을 한 대 칠 뻔한 일이 있었다. 이와 대조적인 경험으로, 학교에서 처음 교수님들을 만났을 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는데 교수님들께서 과한 예의에 당황한 표정을 보인 적이 여러 번 있었고, 동기들도 그런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도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교수님께 살짝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하는 것은 일반적이었고, ‘니’라고 호칭하는 것은 예의 없는 행동이었는데, 말이 사람과 문화를 변화시켜서 30년이 지난 이제는 나도 지금의 문화에 익숙해졌단다.”
“목회자에게 ‘형’이라니?”
이 외에 또 한국인이 놀라는 것 한 가지는 목회자를 “△△꺼(gē, 형/오빠), △△지에(jiě, △△누나/언니)”라고 부르는 문화이다. 이는 언어를 통한 문화적인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대만교회의 한 시기에서 비롯된 문화이다. 필자는 대만에서 여러 목회자에게 이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들었다. 1960-70년대 대만교회 안에는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해서 중도와 보수적인 신앙색채를 가진 지역교회에서 신학교에 가려던 사람들이 신학교에 진학을 하지 않고 평신도 사역자로서 교회를 섬기거나 복음주의 캠퍼스 선교단체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캠퍼스 선교단체는 기본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 제도권 밖에서 사역하는 평신도 사역자이다 보니, 그 호칭이 한국에서 ‘간사’에 해당하는 ‘촨다오(傳道)’ 즉 전도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학생들과의 친근함을 위해 ‘△△꺼’, ‘△△지에’로 스스로를 호칭하였고, 이후 이들이 교회 제도권으로 돌아가 사역을 한 사람이 많기에 이런 호칭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고 한다.
이런 호칭에도 어느 정도 규칙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참여했던 한 선교단체에서는 같은 성(姓)을 가진 경우에 가장 연배 또는 직위가 높은 분은 성 뒤에 ‘꺼’를 붙여서 호칭하였고, 그보다 연배가 어리거나 직위가 낮은 경우에도 이름 뒤에 ‘꺼’를 붙여서 호칭하였다. 그러나 이런 규칙도 상황적으로 생겨난 것이기에 보편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대만교회와 교류를 할 때 이런 호칭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이를 목회자를 향한 또 다른 식의 호칭체계로 이해하면 좋겠다. 주님 안에서 모두 자매와 형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또한 대만교회의 시대적인 산물이요 문화이기 때문이다.
신학교에 대한 과거의 편견이 사라지고 청소년과 대학생 선교단체와 연결되지 않고 지역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바로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하였고, 대만기독교장로회와 같은 본토교회는 그 직분의 체계는 이런 영향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지 않았기에, 현재로서는 한국과 같이 직분으로 사역자를 호칭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필자로서는 과거에 많은 ‘꺼’ ‘지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기에 이런 호칭이 점차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갖고 있다.
언어는 관계를 형성하고, 관계는 문화를 형성한다
이런 언어가 형성한 관계 때문일까, 한국교회와 대만교회 안에서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한국교회는 수직적인 구조와 상대적으로 경직된 체계인 경우가 많은 것에 반해, 대만교회는 수평적인 구조와 유연한 체계인 경우가 많다. 목회자의 권위 측면에서는 한국은 강하고, 대만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성경공부를 할 때만 해도 한국은 목회자가 인도하고 참여자들은 그 인도에 따라서 대답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만은 인도자가 있지만 자유롭게 토론하는 분위기인 경우가 많다. 어떤 형식이 보다 효율적이거나 자유롭거나 교회에 적합한지는 충분히 토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현지에서 생겨난 문화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한 존중되어야 하는 대상이며,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일 뿐임을 인지해야 한다. 대만교회와 서로 만났을 때 차이는 존중하고 인정하여 바울과 같이 복음으로 인해 유연한 태도(고전 9:20-23)를 지님으로 배려가 넘치는 교제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웹진 <<중국을주께로>> 2019.02월호, 통권1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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