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04- 대만은 국가가 아닌가?
- Nehemiah Tan
- 2019년 5월 9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19년 5월 9일
대만은 국가가 아닌가?
쯔위 사건을 통해 본 대만의 국제적 지위
몇 년 전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구성원 쯔위(周子瑜)가 한 지상파 프로그램에서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흔들었다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문제는 중국의 네티즌들이 제기를 하였고, 소속사인 JYP Entertainment는 공식 사과문을 올려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자사 아티스트의 관리의 부족함에 대해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자사의 다른 연예인의 예정된 중국 행사가 취소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소속사는 쯔위로 하여금 사과 영상을 올리게 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중국은 하나뿐입니다. 양안(兩岸)은 한몸입니다. 저는 시종일관 저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것으로 인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중국인으로서 해외활동 도중, 언행의 과실로 인해 회사와 양안 네티즌들의 감정에 상처를 주었습니다. 저는 정말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이 쯔위로 하여금 이렇게 나서서 사과하도록 만들었을까? 중국의 일부 네티즌들이다, 그리고 회사의 운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 올라왔고, 대만의 네티즌들은 이를 ‘아동학대’라는 항목으로 신고했다고 한다. 이 영상을 본 중국의 네티즌들 중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잘못을 알고 사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만은 대만의 대만이기에, 대만의 선택(독립 또는 통일)을 자신은 존중한다”라는 내용도 올라왔다. 한국 내에서는 이 논란에 대해 해석할 필요가 있었고,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의 강효백 교수는 뉴스 인터뷰에서 “대만은 국제적으로 나라가 아닙니다. UN 가입국도 아니고, 세계 모든 기구에서 타이완이라는 국호가 없습니다. 인정이 안 되고요.”라는 내용으로 배경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대만 동정론이 일부 생겨났고, 쯔위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내용의 글을 많이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대만은 왜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리고 대만인의 대만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
UN 창설국에서 퇴출까지
UN이 창설되었을 때 상임이사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5개의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그리고 중화민국(中華民國, the Republic of China)이었다. 그런데 왜 정식 국호가 ‘중화민국’인 대만은 현재 유엔의 가입조차 되어있지 않을까? 이는 근대 중국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인해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1912년 1월 1일 정식으로 시작된 민주공화국은 중화민국이다. 중화민국은 군벌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가 시작되었고, 총통이었던 쑨원(孫文)은 군벌을 소탕하고자 했으나, 그중에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장제스(蔣介石)이며, 그는 바통을 이어받아 북벌을 이어갔다.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여전히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을 소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장제스는 먼저 내란을 제거하고 외부 세력을 저항하자고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여 결국은 마오쩌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의 군대를 팔로군(八路軍, 제8군단)으로 인정하고 연합하여 먼저 일본의 침략에 맞섰다. 그러나 항일전쟁이 마치고 나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내전(國共內戰)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내전에 패배한 장제스는 군대를 이끌고 대만이라는 섬에 후퇴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北京)의 톈안먼(天安門에)서는 마오쩌동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이하 ‘중공’)가 세워졌음을 공포하였고, 중화민국은 대만에서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장제스는 패배하여 후퇴하였지만, 지속적으로 중국 대륙을 향한 반격(反攻大陸)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대만에서의 정부를 운영하였고, 민주세력으로서의 정통성이 있기에 지속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또한 비록 대만에 있으나 장제스와 중화민국은 전체 중국을 대표한다는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마오쩌동을 만나 중공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미국이 거부할 수 없는 대륙의 자원의 잠재력으로 인해 실리외교의 정책으로 대륙을 택하였고, 대만과 국교를 단절한 후 1979년에 대만관계법을 통과하여 대만관의 비공식적 관계를 유지하고 무기를 수출하는 또 하나의 실리외교를 진행하고 있다. 1971년 10월 중공은 알바니아 주도로 제3세계를 중심으로 한 17개의 회원국이 공동으로 중공이 유엔의 대표권을 ‘회복’하고 중화민국 정부(이후에 “장제스의 대표”로 수정)를 유엔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는 결의안을 유엔 사무국에 제출하였다. 이 결의안은 결과적으로 찬성 76표, 반대 35표, 기권 17표, 불참 3표로 중화민국의 유엔에서의 자리는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 채택에 따라 중공이 승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의가 나기 직전, 유엔 창설국이자 상임이사회 국가였던 중화민국은 수모를 겪느니 그 전에 유엔을 탈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자연스레 중화민국의 자리를 얻게 된 중공이 중화민국의 상임이사회 자리도 얻게 되었다. 이 결의의 관건은 중공이 정통성을 지닌 국가라는 결의이기에, 비록 중공의 유엔 가입 시기는 1971년 12월이지만, 중화민국이 가입했던 1945년 10월 24일로 인정이 되었다.

UN 탈퇴 이후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이란 말이 있다. 중국 삼국시대 때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쓴 말인데, 한나라(촉한)와 도적 떼(위)는 양립할 수 없다는 뜻이며, 유씨의 한나라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 말을 대만이 UN을 탈퇴하면서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내부와 외부에서 강화시키고자 사용하였다. 어쩌면 중화민국이 UN을 탈퇴할 수 있었던 이유는 UN의 창설에 동참했고, 상임이사국이었기에 정의와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고, 탈퇴로서 가장 큰 항의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실리외교라는 대세와 흐름을 이기지 못하였고, 동아시아의 외로운 섬으로 남게 되었다.
중공은 UN가입 이후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지우는 일에 노력하고 있다. 국교를 수립하는 조건 중 하나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는 동시에 ‘대만은 중국의 분할할 수 없는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중화민국과 단교를 하는 것이 수교의 조건이 된 것이다. 특히 개발도상국과의 수교에는 경제적 지원이 혜택으로 주어지기에, 동아시아의 작은 섬에 있는 오랜 우방 정부보다 대륙의 지원과 가능성을 선택하는 실리외교로 인해 중화민국은 지속적으로 단교를 당하거나 단교를 당하기 전에 먼저 국교단절을 선언을 해왔고, 현재 중화민국과 공식적인 국교를 이어가고 있는 나라는 17개국만 남아있다.
중화민국-대만은 이런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유엔 가입국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사적인 배경을 다루지 않으면서 단지 ‘대만은 유엔 가입국도 아니다’, ‘대만은 국제법상 국가가 아니다’라고만 이야기를 한다면 매우 안타까운 발언이 될 것이다.
중화민국-대만은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양안의 관계, 국제적인 외교 관계 등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왔다. 대만을 사랑하고 대만과 관계를 갖고 동역하기 위해서는 특히 이런 역사를 인식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상황에서의 이해가 사랑과 동역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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